저는 원래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어요. 성인이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시각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하고, 디자인 학원과 대안학교에서 이론과 프로그램을 배우며 준비한 후 종합광고기획사에 취업해 1년 정도 일하며 디자인 실무와 인쇄 과정을 경험했죠.
그러다 퇴사 후 장기적으로 어떤 디자인을 할지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책’이 떠올랐어요. 대부분의 출판인처럼 저도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거든요. 용돈을 쪼개 책을 사고, 방학 때 친척집에 가면 세계동화전집을 하루 종일 읽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일도 좋아했죠.
보통은 출판사나 북디자인회사에 들어가 경력을 시작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프리랜서 북디자이너를 하고 싶었어요. 문제는 포트폴리오였어요. 광고회사에서는 주로 팸플릿, 포스터, 패키지 등을 작업했기 때문에 단행본 작업 경험이 없었어요. 그래서 가상의 책을 만들어 표지, 내지, 일러스트를 디자인하고 작은 포폴 책자를 직접 만들었죠. 그 다음에는 출판사 연락처를 모아 직접 전화를 돌렸어요. 방문을 사양하는 곳도 있었지만 “근처를 지나는 김에 잠깐 포트폴리오만 전달하고 가겠다”고 설득해 결국 연락한 출판사와 미팅을 잡았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미팅 약속을 꼭 받아내겠다는 절박한 ‘헝그리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꽤 무모한 일이었어요. 경력 없이 청림출판, 21세기북스, 자음과모음, 실천문학사, 동아시아, 더난출판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출판사들의 문을 모조리 두드렸으니.. 그래도 저의 진취성을 좋게 본건지 오히려 입사 제안을 해준 곳도 있었고, 시안 작업도 맡게 되었죠. 다만 어떤 출판사에서는 제가 작업비를 너무 높게 불러 도서 작업까지 성사되지 않았고(광고회사의 시장 규모와 출판 시장의 현실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몰랐었죠..), 어떤 출판사에서는 아쉽게 시안 테스트 작업에서 탈락하기도 했어요.
결국 다시 두 번째 영업을 시작했어요. 그 결과 두 곳에서 연락이 왔고, 그 일을 시작으로 북디자인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어요. 일이라는 것은 시작만 하면 다양한 인연을 통해 계속 이어지기도 하더라고요. 거래하던 출판사의 소개로 다른 출판사와 연결되기도 하고, 편집자가 이직하면서 다시 연락이 오기도 하고, 교정지를 전달하러 간 자리에서 만난 외주편집자가 나중에 출판사를 차리면서 일을 맡겨주기도 하고, 북디자인이 잘 나왔다며 책 날개에 있는 제 연락처로 직접 의뢰가 들어오기도 했어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 그것이 결국 가장 확실한 영업 방법인 것 같아요. 덕분에 저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공백 없이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답니다.